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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

클래식 음악의 역사 - 후기 낭만주의 음악가(베르디)

by rosssa 2025. 3. 18.

후기 낭만주의 음악가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

이탈리아 오페라 사상 최대의 작곡가라 할 수 있는 베르디는 <라 트라비아타>를 비롯하여 우리에게 익숙한 수많은 오페라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곡들은 선율 본위의 작곡이지만 성악적인 기교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사실적이고 날카롭습니다. 소리를 창의적으로 처리하고, 풍부하게 변화하는 다채로운 목소리 표현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그만의 특징입니다. 비록 그의 작품이 대부분 멜로드라마 분위기로 일반 대중의 취향을 전달한다고 하지만 여전히 그의 작품들은 오페라 극장에서 자주 상연되고 있습니다.

 

후기낭만주의음악가(베르디)

 

주세페 베르디는 1813년 이탈리아 북부 파르마현 작은마을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여인숙 겸 잡화점을 경영하였습니다. 그는 마을 교회에서 오르간을 배우고, 10세 때 교회 오르가니스트가 되었습니다. 18세 때 밀라노로 건너가 밀라노 음악원에 입학하려 하였지만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거절당한 후 라비냐 선생을 만나 작곡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3년을 밀라노에서 보낸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베르디는 부세토의 음악 감독직을 맡게 되고, 1836년 미모의 마르게리타와 결혼하게 됩니다. 하지만 행복했던 결혼생활도 4년 만에 첫딸과 아내까지 잃게 되며 끝나버립니다.  

1842년에는 스칼라 극장에서 오페라 <나부코>를 상연했는데 그 내용이 예루살렘을 차지한 바빌로니아왕의 포악한 정치와 유대인들의 이야기를 다뤄 당시 오스트리아의 탄압을 받았던 이탈리아인들에게 크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로 인하여 가족을 잃은 슬픔을 극복하고, 오페라의 샛별로 떠오르며 이후 50년의 시간에 걸쳐 대오페라 작곡가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이 작품 이외에도 <제1회 십자군의 롬바르디아인>, <잔 다르크>, <레냐노의 전쟁> 등의 애국적인 작품들로 그는 이탈리아인의 애국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1859년에는 주세피나와 재혼을 하고, 통일된 이탈리아에서 국회의원을 하며 5년 동안 정치인 생활도 하였지만 이후에는 작곡에만 몰두하였습니다. 1860년대에 작곡한 <돈 카를로>, <아이다> 등은 극적인 표현을 할 수 있는 베르디의 모든 지식과 기법이 총동원된 것으로 아주 높은 수준의 상태에 다다른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던 그는 신문에 실렸던 본인의 비평을 본인 작품에 직접 투영시키며 본인의 부족함이나 잘못을 돌이켜보았다고 합니다.

80세에는 로마 명예시민이 되었고, 83세에는 노후가 힘든 음악가들을 위한 '음악가 휴양의 집'이라는 양로원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1901년 8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베르디는 다음 해 '음악가 휴양의 집' 예배당에 아내와 함께 묻히게 되었는데 그 당시의 유명 음악가 중에서는 가장 장수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까지도 그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의 묘지를 찾고 있다고 합니다.

그의 곡들의 대부분은 19세기의 이탈리아 오페라의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오페라의 전통위에서 극과 음악을 통일적으로 표현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독창의 가창성을 중시했으며, 관현악을 극에 참여시키거나 중창을 충실하게 사용하는 등의 누구보다 앞선 걸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베르디는 보통 남자를 오페라의 주인공으로 선택했는데 이는 그가 힘 있고 당당한 오페라를 추구했던 이유일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말년에는 주로 비극적인 곡을 많이 남겼는데 <팔스타프>와 같은 희가곡을 쓴 그의 대단한 창작력에 놀랄 따름입니다.

베르디는 로시니, 도니제티, 벨리니의 음악 기법을 따르는 반면 힘 있고, 긴장감 있으면서도 단순한 본인만의 음악 스타일을 만들었습니다. 대본가로도 활동했던 그는 리듬 하나하나까지도 대본을 제작하는데에 관여했으며 그의 오페라에는 대형 오페라에서나 볼 수 있었던 무대적인 음향들도 사용했습니다. 또한 그가 만든 오페라는 인간의 내적 감정들을 표현하고, 상황에 따른 세밀한 멜로디를 가지고 있으며, 긴장이 최고에 오른 지점에서 서로 상반되는 선율들을 동시에 울리게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그의 음향 기법이 다소 풍부해졌다고 할 수 있지만 극 전체를 이끌어나가는 부분으로 오케스트라가 사용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바그너의 영향은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