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클래식 음악

클래식 음악의 역사 - 후기 낭만주의 음악가(바그너)

by rosssa 2025. 3. 13.

후기 낭만주의 음악가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 1813~1883)

독일의 작곡가이자 극작가, 지휘자, 음악 비평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바그너는 19세기 유럽 음악뿐만 아니라 문화 전체에서도 독보적인 예술가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그는 대표적인 독일의 오페라 작곡가였는데 다른 작곡가들과는 다르게 본인이 만든 작품의 대본도 직접 쓰고 이를 작곡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음악과 언어에 대한 일체화는 실제 생활에서도 예술과 혼동하기에 이르러 아들의 이름을 극속 인물에 붙이고, 본인의 불륜이나 배신의 이야기를 악극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그의 작품들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으므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현재까지도 천재 또는 질병으로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후기낭만주의음악가(바그너)

 

리하르트 바그너는 1813년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경찰서기였던 아버지 프리드리히 바그너와 어머니 요한나 사이에서 아홉째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그의 출생 후 6개월 만에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다음해 어머니는 루드비히 가이어와 재혼을 했습니다. 가이어는 극장에서 화가이자 배우로 일을 했기에 바그너는 어려서부터 극장과 자연스럽게 가까워졌습니다. 그렇게 연극과 음악이 있는 예술적인 가정환경에서 스스로 대본을 쓰거나 작곡하는 것을 즐겨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음악에 재능을 보이자 가이너는 바그너에게 본인의 친구 칼 마리아 폰 베버를 소개하였고 그는 바그너에게 음악적 영감을 주었던 첫 번째 사람이 되었습니다. 틈만 나면 베버의 <마탄의 사수> 등을 연주하며 지냈지만 1822년에 입학한 드레스덴 왕립 학교에서는 그리 특출 난 학생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13세의 어린 나이에 호프만과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좋아하면서 로이발트라는 5막극을 완성하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이때의 바그너의 작품들이 대단한 천재성이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중간에 쉬지 않고 계속 작업하여 마무리를 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의 이러한 성향은 지속되어 4일 밤 동안 상연해야 하는 <니벨룽겐의 반지>가 약 26년 동안 쓰이며 완성되었고, 그런 끈기와 인내를 가지고 노력한 세월이 바그너를 훌륭한 예술가로 승격시켰습니다.

바그너만큼 본인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일에 열심히였던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어색해한다거나 창피해하는 일 없이 적극적으로 독일과 파리를 오가면서도 전혀 지쳐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는 문필에도 상당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에 작가나 비평가로서도 활동하였고 논문, 에세이, 시, 오페라 대본 등 수많은 글을 남겼으며 <베토벤 순례>, <오페라와 드라마> 등이 있습니다. 작곡가로서 그에게 첫 번째 성공을 안겨준 작품은 오페라 <리엔치>였습니다. 드레스덴에서 보낸 7년간의 기간 동안 그는 작센 왕립 지휘자로 임명되었고, <방황하는 네델란드인>과 <탄호이저>과 같은 중기 오페라를 쓰고 상연했습니다. 하지만 1849년 일어났던 5월혁명에 가담하며 체포영장이 발부되었고, 12년 동안 스위스 취리히 등에서 망명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때에도 많은 작품을 썼으며 대작 <니벨룽겐의 반지> 및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착수하게 됩니다.

바그너는 1836년 여배우였던 민나 플래너와 첫 번째 결혼을 하지만 1865년 프란츠 리스트의 딸 코지마와의 사이에서 사생아를 낳았고 1870년 그녀와 두 번째 결혼을 하게 됩니다. 바그너는 자신에게 헌신하면서도 자신과 동등한 지적 동반자였던 코지마와 남은 평생을 함께 하였고, 오페라 작품을 쓸 때면 항상 코지마와 상의하고 여러 가지 일을 함께 하였습니다.

그는 본인의 작품에 대한 비전을 온전하게 보여주기 위하여 바이로이트에 전용 오페라 극장을 건립하였습니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은 오페라를 관람하는 사람들이 극에 몰입할 수 있도록 공연 중 객석을 어둡게 한다던지 관현악단을 무대보다 낮게 하는 등 혁신적인 요소 적용으로 오늘날까지도 이곳에서는 매년 바이로이트 음악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바그너와 가족은 그의 요양을 위하여 베네치아로 여행을 떠났지만 1883년 심장마비를 일으키며 71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의 시신은 바이로이트의 반프리드의 정원에 묻혔습니다. 그는 음악뿐만 아니라 예술과 문화의 발전에도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그가 끼친 영향은 오페라나 음악 분야는 물론 철학, 정치, 역사 등 다양한 분야에 커다란 충격과 변화를 주었고, 그의 새로운 화성어법이 발전하며 현대의 작곡가들에게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