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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

클래식 음악의 역사 - 낭만주의 음악가(베버, 로시니)

by rosssa 2025. 2. 19.

낭만주의 음악가

베버(Carl Maria von Veber, 1786~1826)

베버의 음악사적 가치는 낭만주의 국가적 오페라를 완성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대표작인 <마탄의 사수>는 낭만주의 꽃을 피우게 했던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었던 오페라였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예술에 크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독일의 아름다운 자연과 민속예술을 직접 체험하며 그의 타고난 낭만적인 성향은 더욱 커지게 되었습니다. 다른 나라의 오페라를 보고 국민감정을 깨닫게 되며 독일적인 오페라의 필요성을 느낀 것도 이러한 생활의 결과였습니다.

 

낭만주의음악가(베버,로시니)

 

베버는 1786년 독일의 오이틴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선천적으로 좌골 이상으로 인해 4세가 될 때까지도 걷는 것이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악장 또는 극장 감독과 같은 일을 했는데 그 당시 신동 모차르트가 유명했던 때라 베버에게 피아노를 가르쳤습니다. 또한 그의 사촌 누나가 모차르트의 아내이기도 했습니다.

재능이 뛰어났던 베버는 요제프 하이든의 동생인 미하엘 하이든 및 여러 사람들에게 음악 교육을 받고, 18세가 되던 해 브레슬라우오페라 극장의 악장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2년후에는 그만두고 유럽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오페라를 비롯한 여러 작품을 작곡하였습니다. 글을 쓰는 일에도 재능이 있었던 그는 당시 퍼지고 있던 낭만주의 문학에 매료되어 음악에 그것을 도입하고자 했습니다. 1813년에는 프라하의 오페라 극장 지휘자가 되었지만 또다시 1817년 드레스덴으로 옮기게 됩니다. 이때부터 낭만주의 음악가로서 더욱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며, 그 유명한 <마탄의 사수>가 만들어집니다. 그는 오페라 이외에도 극적으로 강하고 다양하게 색채를 사용하였고, 그중에서도 클라리넷과 바순 및 호른의 표현력을 개발한 일은 그의 큰 공로가 되었습니다. 기악 작품으로는 <콘체르트슈튀크> 및 <무도에의 권유>가 가장 유명합니다.

또한 베버는 근대 지휘법의 기초를 만든 지휘자였습니다. 그는 본인의 오페라를 상연하면서 큰 규모의 오페라를 이용했기에 연주도 하며 틈틈이 지휘를 해야하던 예전 방법을 탈피하여 음악사상 처음으로 지휘봉을 사용했습니다. 음악세계에서 지휘자가 겉으로만 보이는 지도자가 아닌 작품의 내면적인 이해가 가장 필요한 자리임을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1826년 39세의 베버는 런던에서 <오베론> 상연을 마치고,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후 그의 장례식에서는 바그너가 베버의 가극 <오이뤼안테>의 선율을 따서 만든 음악을 지휘하고 추도문을 낭독하며 선배의 업적을 칭송했습니다.

 

로시니(Gioacchino Antonio Rossini, 1792~1868)

로시니는 <비단 사다리>, <세빌리아의 이발사>, <도둑까치>, <윌리엄 텔> 등 지금까지도 유명한 오페라들을 작곡한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입니다. 미스터리하게도 마지막 오페라인 <윌리엄 텔>을 작곡한 것이 37세였는데 그 이후부터 사망했던 76세까지는 오페라를 전혀 만들지 않고, 약간의 종교적인 곡만 썼을 뿐입니다. 그는 오페라 작곡가이지만 생의 많은 시간은 오페라와 관련 없는 생활을 한 것입니다.

그는 1792년 관악기 주자인 아버지와 소프라노 가수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쳄발로와 성악을 공부하였고, 볼로냐의 시립 음악학교에서 음악교육을 받았습니다. 1811년에 <디도의 죽음>을 시작으로 1812년 <시금석>을 만들며 유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어서 <세빌리아의 이발사>, <오셀로>, <도둑까치> 등을 내놓으며 유럽 각지로 알려졌고, 이후 파리의 이탈리아 극장의 음악 감독으로 근무하였습니다. 이곳에서 활동하며 <윌리엄 텔>의 성공을 마지막으로 오페라는 일체 만들지 않고, 모교였던 볼로냐 음악학교의 명예교장으로 재직하였습니다.

부모님의 영향으로 그가 극장과 관련된 일을 한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무슨 이유로 37세가 되던 해부터 오페라 작업을 그만 두었는지는 여전히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음악학교를 졸업할 무렵부터 1년에 평균 2편 정도의 오페라를 쓰던 최고의 작곡가가 갑자기 그 자리에서 내려온 데는 무언가 석연치 않기는 합니다. 그가 오페라를 그만둔 37세와 같은 숫자인 37편의 오페라를 쓴 것 또한 우연 치고는 절묘하게 느껴집니다.

<윌리엄 텔> 서곡을 연주할때면 반드시 오케스트라에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하는 징크스가 있어 프로그램에서 제외시키는 오케스트라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에도 로시니는 다시는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았고, 1868년 지병이 악화되면서 7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