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클래식 음악

클래식 음악의 역사 - 낭만주의 음악가(베를리오즈)

by rosssa 2025. 2. 25.

낭만주의 음악가

베를리오즈(Louis Hector Berlioz, 1803~1869)

독일에 비하여 보잘것없었던 프랑스의 낭만주의 음악계에 베를리오즈가 혜성처럼 나타났습니다. 그는 근본적으로 낭만주의 작곡가입니다. 그의 삶 자체가 소설이라 할 만큼 꿈과 생활을 구별하지 못하고, 바람과 동경이 현실을 꺾어버렸습니다. 그는 단계적이고 논리적인 것을 무시하였고, 공상으로 인해 창조라는 것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모습이나 삶 그리고 작곡하는 방법까지 뭐 하나 평범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대표작 <환상 교향곡>은 그런 낭만적인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낭만주의음악가(베를리오즈)

 

그는 1803년 남프랑스의 라코트생앙드레에서 변호사인 할아버지와 의사인 아버지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본인처럼 의사가 되기를 바랬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19세 때 파리의 의과대학에 진학했으나 해부학 수업에서 시체를 보고는 그 길로 학교를 뛰쳐나왔습니다. 그는 글루크의 오페라에 빠져서 작곡가가 되기를 결심하고 아버지를 설득하여 23세에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였습니다. 어려서 특별한 음악교육을 받지 않은 이유인지 베를리오즈는 플루트와 기타만 조금 연주할 뿐 피아노조차도 칠 줄 몰랐습니다. 파리 음악원에서 작곡법과 푸가를 공부하며 스스로 탐구하는 자세를 보였지만 보수적이었던 교수들과 음악적으로 자주 충돌이 있었습니다. 1830년 로마상 콩쿠르에서 대상을 받아 로마에 3년 예정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향수병으로 18개월 만에 파리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 시기에 파리를 방문한 영국의 셰익스피어 극단의 공연을 관람하러 간 베를리오즈는 햄릿의 오필리아 역을 맡은 여배우 해리엣 스미드슨에게 반해버립니다. 그녀에게 수많은 편지도 쓰며 애정을 표현했지만 그녀는 그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고, 이에 상심하여 쓰게 된 곡이 그 유명한 <환상 교향곡>입니다. <환상 교향곡>은 유명하지만 <렐리오>라는 곡과 함께 2부작이라는 것은 많이 알려지지 않습니다. 두 곡 모두 사랑의 실패에 관련하여 만들어진 곡으로 내용도 파격적이고, 관현악법도 특이합니다. 

<환상 교향곡>을 포함하여 <로미오와 줄리엣>, <파우스트의 저주> 등은 표현이 많이 확대되고, 구성도 거대화되면서 보여지는 것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한 오케스트레이션이 아주 다채로운 반면에 화성은 빈약하지만 선율은 명확하고, 리듬도 새로워 전개하는 방법이 극적입니다. 때문에 연극적인 요소가 전체적으로 표현된 베를리오즈의 음악은 오페라나 발레에는 어울리지 않기도 합니다.

1834년부터 자작의 연주회와 작곡 등을 하였고, 1835년부터는 음악비평가로 활동하며 생계를 이어나갔습니다. 1837년에는 정부로부터 위촉받아 종교음악 <레퀴엠>을 작곡하기도 하였지만 1838년 <벤베누토 첼리니>의 실패로 한동안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1842년부터는 외국으로 연주 여행을 떠났으나 1848년 프랑스혁명으로 귀국하였고, 이 무렵 그의 저서 <회상록>을 쓰기 시작합니다. 1850년에는 '필하모닉협회'를 구성하면서 적극적으로 연주 활동을 진행하려 하였으나 이마저도 좌절되면서 다시 연주 여행을 갔습니다. 

1854년 파리에서 3부작 오라토리오 <그리스도의 어린 시절>가 성공을 거두고 다음해 만국박람회의 개막 축하 공연으로 <테 데움>이 연주되었으며, 1856년 프랑스 아카데미회원으로 선출되면서 드디어 그의 생활이 안정을 찾게 됩니다. 하지만 1868년 러시아에서의 연주회를 마지막으로 그의 활동은 마침표를 찍고, 지병이 악화되면서 1869년 파리에서 65세의 일기로 생을 마치게 됩니다.

베를리오즈는 프랑스에서 유일한 교향곡 작곡가로서 '표제음악'이라는 극적인 관현악적 기법을 시작하여 음악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많은 후배 작곡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글을 쓰는 실력도 뛰어나 바그너와 함께 명문가로 유명하며, 그의 자서전 <회상록>은 음악가가 집필한 전기문학 분야에서 매우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